165. 斯陀含에 대하여 ------------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斯陀含은 성문사과의 두 번째 지위로, 聲聞四果의 두 번째 지위로, 인간과 천상에 각각 한 번씩 生을 받은 뒤에야 열반을 증득하게 됩니다. 須陀洹이 경계에 이끌리는 마음을 제어하는 수준이라면 斯陀含은 육근 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완전히조복해 주체를 회복한 경지입니다. 수다원에서 계속 수행 정진하면 다겁 생래로 쌓인 과거의 습기가 차츰 사라져 사다함의 경지에 이릅니다. 사다함은 업식에 거들리는 어리석음을 한 번만 더 되풀이하면 더 이상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는 경지를 말합니다. 斯陀含은 지혜를 얻어 번뇌와 미혹을 벗어나 진리를 보는 단계인 見道를 이룬 뒤 修道의 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확연히 깨친 이치에 따라 수행해 나가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견도후에 수도가 있는 것이지, 견도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애쓰는 것은 수도가 아니라 방황입니다. 남편이 술에 취해서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아이고, 또 시작이구나!' 하고 짜증이 올라왔습니다. 부인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짜증이 솟아오르는 순간, 마음을 돌이키고 이치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연습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술주정은 어린 시절 상처로 말이암은 것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면 짜증이 났다가도 '아! 내가 또 내 생각에 빠졌구나'하고 돌이키고 '여보, 미안해 방금 했던 애기 다시 한 번 해봐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도의 과정입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이치를 깨친 뒤에는 그 이치에 맞춰 한결같이 닦아나가야 합니다. 열 번해서 안 되고 스무 번 해서 안 되고 백 번 해서 안 되다가도 어는 순간 불현듯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깨달음은 자전거 타기와는 달라서 한 번 되고난 뒤에도 다시 또 넘어집니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한 번 깨닫기만 하면 그 순간 모든 게 완벽한 경지에 이르게 될 거라는 생각은 깨달음에 대한 환상입니다. 하지만 한 번도 깨달아본 적이 없는 사람과 한 번이라도 깨달음의 맛을 본 사람은 그 힘이 다릅니다. 단 한 번이라도 깨달음의 맛을 보고 나면 '확실히 이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하는 믿음이 생깁니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서 쾌나 불쾌가 일어나는 그순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으면 업식이 경계에 반응은 하되 새로운 욕망을 일으키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수다원은 그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쾌 불쾌에 이끌려 욕망을 일으킵니다. 물론 수다원은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이 욕망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바로 뉘우칩니다. 그러나 斯陀含은 이렇게 꺼들리고 깨치는 과정을 한 번만 더하면 더 이상 꺼들리는 일이 없어지는 거의 마지막 연습의 경지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 통증은 다만 통증으로 관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다리가 아프구나, 통증이 있구나' 이렇게 바라볼 뿐이지 거기에 좋고 싫은 느낌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통증을 느끼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 번은 더 싫은 마음에 휩쓸리더라도 그 다음부터는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는 斯陀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