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다툼을 벗어난 三昧 -----------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부처님은 수보리를 가리켜 欲을 여윈 阿羅漢으로 무장 삼매에 들어 아란나행을 즐기고 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욕을 여의었다는 것은 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모든 욕망을 여의였다는 말입니다. 無諍 三昧란 번뇌와 다툼을벗어난 삼매를 말합니다. 만일 수보리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내가 제일이다.' '나는 무쟁 삼매에 들었다'라는 생각이 있다면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산 하나를 두고 두 사람이 다툽니다. 한 사람은 東山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 사람은 西山이라고 주장합니다.동산이라고 하는 실체, 서산이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다투는 것입니다. 하나의 산을 놓고 서쪽에 사는 사람은 동산이라 하고 동쪽에 사는 사람은 서산이라고 하지만 그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닙니다. 그대그때 처한 상황과 인연에 따라 동산이기도 하고 서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는 相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는 동산이라고 하는 사람과 서산이라고 하는 사람 모두를 상대로 싸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전보다 한 단계 높은 싸움일까요? 아닙니다.상을 짓는 데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我에 집착하든 法에 집착하든 집착하기는 마찬가지고 상을 짓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재물을 갖고 다투나 권력을 갖고 다투나 다를 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돈 못 벌었다고 우는 사람이나, 권력을 못 잡았다고 우는 사람이나, 명예를 못 얻었다고 우는 사람이나, 도를 못 얻어서 우는 사람이나 상에 집착해서 생기는 괴로움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을 짓고 집착한다는 점에서는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든 상을 내려놓으면 동산이라는 말을 들어도 다툼이 없고 서산이라는 말을 들어도 다툼이 없습니다. 동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가 서쪽에 사는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서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가 동쪽에 사는 사람임을 알아차리니 다툴 일이 없습니다.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깨쳤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깨달은 이라 부르고 남을 돕는 선행자라고 말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나는 깨달았다'는 상을 짓지 않으며 '내가 남을 돕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를 '법성계]에서는 '法性圓融無二相'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법의 근본이 둥글고 두루해서 두 가지 모습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상을 지으면 저절로 두 개의 상이 됩니다. 깨끗하다는 상을 지으면 반드시 그 옆에 더럽다는 상이 생기고, 선하다는 상을 세우면 그옆에 저절로 악하다는 상이 생깁니다. 그래서 두 개의 상이 생긴다는 것은 만 개 이상의 상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법의 실상은 만 가지 상이 다 일상으로부터 일어난 것인데 그 일상마저도 없다는 것이 無相인 것입니다.
흔히 '불법의 이치는 淸淨하다'고 말할 때의 청정함은 더럽다는 말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번뇌와 분별심이 사라진 마음자리를 청정하다는 이름으로 부를 뿐입니다. '지고한 행복'이라는 말도 행과 불행의 상대적 개념의 행복이 아니라 행불행을 떠난 경지, 어떤 상황에서도 괴로움으로 변하지 않는 기쁨을 뜻합니다. 경계에 꺼들리지 않는 경지, 아무 다툼이 없는 경지를 이릅니다. 그러한 경지를 모든 괴로움이 사라졌다는 뜻의 '涅槃',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뜻의 '解脫'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