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쇠렌 키르케고르 –공포와 전율
진리는 어째서 주관적인가?
- 나는 오직 무한히 포기할 때 영원의 가치를 의식할 수 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실존을 장악했다고 말할 수 있다. -
- 신앙의 기사는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해야 한다 -
키르케고르는 “아무도, 아무도 감히 자기 자신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라며 한탄했다. 이렇듯 몰개성적이고 무책임한 대중의 행태를 ‘복화술’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키르게고르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생명의 희생까지도 감당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의 말이라면 읽거나 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만이 자기 생명의 무게를 짊어짐으로써 진정으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가치와 의의는 오직 개체(개인)에게 있는 것이었다.
<공포와 전율>에서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을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단계로 구분한다. 심미적 실존은 오롲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 이런 삶은 쾌락의 충족에서 나락으로, 다시 새로운 쾌락의 추구를 반복할 뿐이며 불안과 절망이 끝없이 따라다닌다. 그래서 가장 낮은 단계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보다 나은 윤리적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 윤리적 실존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타인도 고려하며, 자신의 행동이 보편적 도덕률에 부합하도록 노력한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훌륭할 것 같은데, 키르케고르는 사실 인간은 도덕률을 따를 능력이 없을뿐더러 고의로 도덕률을 위배하는 존재로 보았다. 마치 키르케고르 자신의 방탕했던 청년 시절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실존이다.
종교적 실존이란 하느님을 향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키르케고르는 “신은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한다”라고 말한다. 그 사랑은 부부간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윤리적으로 부합하는 일에 신학적으로 회의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혹은 ‘윤리적 차원과 신앙적 차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이 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비극적 영웅과 신앙의 기사라는 두종류의 인간을 제시한다. 여기서 비극적 영웅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아가멤논 왕을 가리킨다. 아가멤논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도록 요구받는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서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와도 비슷해 보인다. 그러니 키르케고르는 두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보았다. 아가멤논의 경우는 국왕으로서의 의무가 딸에 대한 아비로서의 의무를 압도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에는 아무런 윤리적 목적이 없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아브라함 자신의 경건한 믿음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는 윤리학에 대한 신학적 회의가 담겨 있다. 아브라함은 살인범이 되거나, 아니면 신앙이 깊은 인간이 된다. 이 두 신분 사이에는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 이 거대한 심연 앞에서 신앙의 기사는 믿음의 도약을 감행해야만 한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다. 윤리적 고려까지도 포기한 채 자신의 모든 것을 신께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히 포기하는 단계는 곧 신앙의 마지막 단계로,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바로 이렇게 무한히 포기하는 기사였다.
- 진리는 주관적이다 -
키르케고르는 대단히 이상한 명제 하나 내놓는다. 진리는 주관적이며, 주관적인 것만이 실재라는 것.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서양 근대 철학의 중요한 특징 한 가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근대 철학에서 주체는 언제나 한 발 물러나 있는 고요한 방관자였다. 심지어 데카르트에게는, 이 고요한 관찰자에게 육신이 있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 주체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행동하는 자는 그저 조용히 세상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다. 그는 의식적으로 삶에 참여하는 존재다. 그러나 세상은 거대한 불활실성으로 덮여 있고, 모든 개인은 언제나 얼마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책임과 위험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찾는 것이 소위 ‘객관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객관성이란 다른 권위 있는 존재에게 문제 해결을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스스로 선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독립적이고자 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의 충고만을 듣는다. 그렇다면 그는 영웅이라 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의 문제에서도 이러한 개체성을 옹호하며 말했다. “신앙은 일종의 역설이다, 개체성이 보편성보다 더 높이 존재한다.” “ 인간의 모든 삶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은 격정이며, 신앙이 곧 격정이다.”라고.
키르케고르는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헤겔 철학에 직접적으로 반대하였다. 키르케고르가 보았을 때 ‘정-반-합’의 헤겔 변증법에서 ‘합’은 ‘정’과 ‘반’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어야 한다.그러므로 헤겔 철학의 핵심은 ‘이것이면서 저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인간의 실존에 ‘이것이면서 저것’은 없다. 모든 사람은 결국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선택에 직면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선택이 최종적으로 그 자신의 삶을 구성한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나’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알아야 하며, 바로 그 선택을 통해 자아의 존재가 진실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키르케고르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거대한 추상 정신의 일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책임을 떠안는 살아 있는 주체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은 ’나‘가 떠맡는 것이며, ’나‘만이 사랑, 미움, 불안, 공포, 절망 같은 감정의 주체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