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악은 무엇인가?
- 악은 실체인가? -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악은 무엇인가?”,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치열한 고뇌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놓는다. “악은 선의 결여다.” 이러한 사상의 원류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악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끝에 악은 실체가 아님을 발견했다. 악은 손상된 의지, 최고 본위에 대한 배반이다. 하느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기울어져 나락에 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창조한 만물은 마치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분유’처럼 그 본성이 모두 선하다. 예를 들면, 사람도 평상시에는 대체로 건강하고 병이 생기는 것은 일시적이다. 병은 단지 건강이 결여된 상태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선과 악을 논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참된 선이며 영원하다. 그러므로 ㅎ느님은 악을 창조할 수 없다. 악은 실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악은 일종의 선의 배반, 선을 결여한 상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년에 집필한 <엔키리디온>에서 악을 물리적 악, 인식의 악, 윤리적 악으로 구분한다. 물리적 악은 자연 재해나 신체적 결함 같은 것으로, 자연 만물이 하느님의 완전성을 결여한 상태다. 인식의 악은 인간의 이성의 유한성, 즉 하니님의 全知를 결여한 상태다. 윤리적 악은 참된 선에 대한 배반이다. 그런데 앞의 두 가지 악과 달리, 윤리적 악은 하느님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낸 것ㅇ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 선과 악은 모두 인간 자신의 선택 -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에서도 대화형식으로 더욱 체계적으로 악의 유래와 인간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 논한다. 그는 이 대화에서 낙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악을 저지르게 되었다면, 하느님은 왜 애초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가? 그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마음껏 악을 행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선을 행하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를 선택하라는 뜻에서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이 인간의 두 손을 창조한 것도 무기를 들어 살상을 저지르라는 것이 아니라 두 손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미덕을 실천하기를 바란 것과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안의 선을 인식했다면, 그것을 오용하는 인간만 바라보기보다 그것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할 것이며, 자유의지는 신성한 선의 부여이므로 마땅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이러한 자유의지가 없다면 누구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없다.“ 하느님은 인간이 악을 저지를 것을 미리 알고 계시며, 악인은 마땅히 자신의 악에 대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악행은 그 자신의 선택이지 하느님의 잘못이 아니다. 하느님은 분명 자유의지 없는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인간 스스로 선택한 윤리적 삶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자유으지로 미덕을 함양하고 진리를 추구할 수도 있으며, 육체적 향락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중간 선’이다. 인간 자신의 덕행에 대한 책임은 최종적으로 그 자신에게 있으며, 하느님은 그 사람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 신앙의 의의 -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마음과 영혼 전부를 하느님께 바치기고 한 때는 386년의 어느 날이었다. 밀라노의 거처에 있는 정원을 홀로 걷고 있던 그는 자신의 방탕하고 타락했던 지난 삶을 떠올리며 내적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서 강렬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야? 지금 당장 더러운 과거를 끝장 내야지!“ 바로 그때, 정원 어디에선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집어 들어요, 어서 읽어요.“ 그는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성경을 펼쳐 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다. ”또 낮에와 같이 정직하게 행하며 흥청거리거나 술 취하지 말고 침실을 더럽히거나 방탕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 이 문구가 그의 가슴에 강하게 와 부딪혔다. 그는 하느님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에 세례를 받았다. 이 사건은 ‘밀라노 정원에서의 체험’으로 불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게 신앙을 회복한 뒤 철저히 개변했다.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정처 없이 떠돌던 작은 배가 마침내 방향을 정하고 돛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빛을 등지고 있지만,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내 눈은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내 몸은 빛의 비추임을 받지못하고 있습니다. 이후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해진 그는 더 이상 혼란과 고뇌에 방황하지 않았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느님은 생명의 전부를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