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임마누엘 칸트 ---------- 순수이성비판
- 선험적 종합판단이란 -
칸트가 살던 시대에는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라는 양대 철학 전통이 있었다. 라이프니츠로 대표되는 합리론은 수학의 형식 위에 세워진 철학으로, 관념간의 확정적, 필연적 상호관계를 강조한다. 합리론자들에게는 수학처럼 명석판명한 선험적 지식이 만능 묘약이었다.칸트가 받았던 대학 교육도 이런 전통에 속해 있었다. 또 다른 전통은 로크, 버클리, 흄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경험론이었다. 경험론에서 중시하는 것은 사물의 실제 정황, 사물들 사이의 혹은 관념들 사이의 관계댜. 경험론자들도 선험적 지식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지식은 반드시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을 강조했다. 두 진영의 대립을 비유적으로 묘사하자면 , 경험론자들이 세상에 대한 모든 지식을 외부 세계에서 구하려 드는 거지 무리 같았다면 합리론자들은 “뭘 그리 외부에서 구하나? 우리에게는 날 때부터 지닌 ‘선험적 지식’이라는 황금열쇠가 있는데!”라고 자부하는 귀족 집안 자제들 같았다.
칸트가 자처한 임무는 이런 두 진영의 사상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경험 없는 사고는 텅 비었고, 사고 없는 경험은 눈멀었다”라는 것이 칸트의 진단이었다. 칸트 연구자인 윌리엄 월시는 “과학의 권위를 견지한 채 도덕의 자치를 수호한” 것이 칸트 철학의 의도였다고 말한다. 또 칸트 자신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성을 제한함으로써 신앙에 자리를 내주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의 3대 비판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서두에서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물음’을 제시한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칸트의 3대 비판은 각각 이 세 가지 물음에 답하기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네 번째 물은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답하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칸트의 비판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이성이 무엇을 다룰 수 있으며 다룰 수 없는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하고, 다룰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섣불리 망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순수이성비판>이 해결하고자 한 물음은 ‘선헙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였다. 바꾸어 말하면, 과학적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라고도 할 수 있다. 칸트는 비판을 선험적 판단과 후천적 판단으로 구분한다. 이것은 근대철학에서 지식을 구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1+1=2라는 것이 선험적 판단이라면, 후천적 판단은 경험적 명제, 즉 ‘사과는 빨갛다’ 같은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또다시 중요한 구분을 한다.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이 그것이다.
분석판단이란 무엇인가? 칸트의 말에 따르면, 주어안에 술어의 개념이 포한된 것이다. 예를 들면 ‘물체란 부피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피가 없고 연장 속성이 없는 물체는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분석판단이 참인 이유는 주어와 술어의 사이에 논리적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분석판단을 부정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에 빠져듦을 의미한다.논리적 모순의 전형적인 예는 ‘둥근 것은 각져 있다’와 같은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종합판단에서는 주어와 술어 사이에 논리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ㅅㄹ어의 내용이 주어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사과가 빨갛다’거나 ‘지구의 자전 주기는 24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는 모든 경험적 판단은 일종의 종합판단이라고 말했다.
분석판단에는 노리적 필연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칸트는 분석판단을 다시 다시 선험적 분석판단, 후천적 종합판단,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 칸트가 중요하게 다룬 것은 ‘선험적 종합판단’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경험에 기반한 판단이 선험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였다. 선험적이라는 것 자체가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뜻 아닌가? 칸트는 수학, 물리학, 윤리학, 형이상학‘을 예로 들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선험적이면서도 종합적 판단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5+7=12‘라는 것은 분명 선험적 종합판다이다. 우리는 단순히 5와 7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둘의 합이 12라는 결론을 얻을 수 없다. ’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뿐‘이라는 기하학 명제 또한 직관을 통해 얻은 공리이므로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선험적종합판단을 다시 순수수학적인, 자연과학적인,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나누었다. 모든 물리학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심지어 형이상학에도 선험적종합판단이 존재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명제가 그 예다. 만약 이 명제가 성립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견고하게 보증될 수 없다.
-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객관성은 ’나‘에게서 비롯된다 -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선험적종합판단은 인간의 마음과 대상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다. 이 관계에 대해 칸트는 혁명적 해석을 내놓는다. 앞서 흄의 이론에서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한 사물의 관념만이 유효한 것이었다. 우리는 관찰을 통해 태양이 둥글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인과율에 대한 흄의 회의는 경험적 지식의 항상성과 필연성을 부정했고, 이는 과학 지식조차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재난적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뉴턴이 세운 고전물리학은 흄의 회의에 대한 가장 좋은 반례다. 인간의 마음이 정말 흄이 생각한대로 같다면, 인간의 마음은 그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여 특정 대상에 대해서 각각의 독립적인,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인식만 얻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이렇다면, 보편적인 과학 이론도 성립될 수가 없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의 ’마음과 대상‘의 관계를 다룬 흄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우리의 인식이 대상에 그대로 부합하는 것‘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가정했다. 우리는 보통 외부의 사물을 인식할 때 그 사물이 시간과 공간에 놓여 있다고 전제한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은 감각기관의 경험하는 재료가 아니며, 다른 어떤 대상의 속성도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에게 인식의 범주다. 모든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세상을 볼 수 없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을 칸트는 ’감성적 직관의 형식‘이라고 불렀다. 그밖에도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기초로 판단의 범주를 총 12개로 분류했다. 분량, 성질,관계, 양상 안에 각각 세 종류의 판단 형식이 포함돼 있다. 이러한 범주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인식 틀 혹 인식 능력이라 할 수 있다.우리는 이러한 틀을 바탕으로 사물의 수량과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며, 무엇은 가능하고 무엇은 불가능하다는 등의 판단을 내린다. 인과관계도 12개의 범주 가운데 하나다.
칸트가 제시한 이성적 사유의 도구는 사람이 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색안경과 같다.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이 색안경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인간의 마음은 자기 자신이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대로 대상을 인식한다. 모든 인간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적 판단은 보편적이다. 그러므로 객관성은 외부 세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부터, 자기 자신이라는 인식의 주체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마음과 인식 대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 칸트의 방식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도 일컬어진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제시한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마음의 작용을 거친 결과가 곧 인식이라는 구조를 제시한 것이다.
-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 -
대상이 인간의 마음에 다가와 작용한 것이란, 우리가 인식한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작용을 거친 대상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항상 모종의 색안경을 걸친 채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실제 색상은 어떤 색깔일까? 이 물음에 대해 칸트는 고개를 내젓는다.
칸트는 세상을 현상과 물자체로 구분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상일 뿐이며, 물자체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물자체는 초험적 영역에 속해 있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성의 범주로는 다룰 수 없는 대상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현상 영역에 국한된 일로 물자체에는 다다를 수 없다.
칸트는 어째서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했을까? 이는 인간의 인식에 경계를 그은 대단히 중요한 구분이다. 인간의 지성은 경험을 통해 현상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범주를 통해 감성 세계 이외의 대상 – 예를 들면, 신 —을 인식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칸트의 위대함은 그의 비판성에 있다. 여기서 비판이란, 근거를 찾은 뒤에 경계를 그음을 의미한다. 칸트는 과거에, 심지어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실상 아무 의미 없는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쓸데없는 말을 하는 이유는그 사람이 단지 말이 많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유효한 범주를 벗어나 있는 것까지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1804년에 죽은 칸트의 묘비에는 이렇게 써 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를 놀라움과 경건함으로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