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제러미 벤담 –-----------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

- 공리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 벤담의 공리주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기본 전제로 한다. 첫째, 행복을 계산할 때는 공동체를 기준으로 한다. 벤담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행동이 공동체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공동체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경향보다 클 때 그 행동은 공리와 공리 원칙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공동체의 이익은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의 이익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공동체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공동체는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공도체는 학교의 한 반이거나 국가 심지어 인류 전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경우, 각각의 입장에 따른 이익과 폐단이 제각기 달라 서로 융화되지 못할 수도 있다. 둘째, ‘등가 원칙’, 즉 모든 사람의 가치는 평등하다는 것이다. 벤담은 “모든 사람의 가치는 귀천이나 고하 없이 평등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모든 사람의 행복값은 1이며, 어느 누구의 행복값도 1 이상으로 계산될 수 없다”라고도 말한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벤담의 시대에는 계층 간 차이가 극심했다. 수치로 계산하자면, 귀족의 행복값이 100이라고 할 때 일반 농민의 행복값은 1 정도였다. 즉 벤담이 제시한 이 원칙은 많은 이들의 사회적 특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현대 민주사회의 조건에 더 가깝다. 샛째, 쾌락의 총량은 계산될 수 있다. 이전의 도덕철학과 달리, 공리주의는다른 어떤 추상적인 원리도 언급하지 않았다. 공리주의는 단순하고 간명했다. 벤담의 ‘쾌락 계산법’ 또한 매우 단순하다. 고통은 단지 ‘마이너스 쾌락’일 뿐이다. 벤담은 쾌락의 범주를 쾌락의 강도, 지속성, 확실성, 시간적으로 멀고 가까움, 재생 반복성, 순도, 발생의 범위 등 일곱 가지로 나눈다. 이렇게 명확한 분류는 ‘쾌락은 계산할 수 있다’는 생각과도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물론 실제로 쾌락을 계산한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의 쾌락과 바흐의 바로크 음악을 들을 때, 어느 쪽의 쾌락이 더 크거나 작은지 어떻게 계산할 수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이 벤담의 공리주의에 대해 비판한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 소수는 항상 희생돼야 하나? - 그러나 이런 벤담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이들도 존재하지 않을까? 물론 존재한다. 공리주의 지지자들은 공리 원칙이 단순명료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반대자들은 벤담의 공리 원칙이 너무 거칠고 단순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한다. 공리주의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과연 모든 사람이 행복만을 추구하는가? 벤담은 모든 사람이 이익을 좇고 손해를 피한다는 것을 자명한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과연 모든 사람이 이런 식의 쾌락주의의 전제만을 받아들일까? 그보다 더 높은 원칙을 추구하는 사람은 과연 없을까? 둘째, 왜 사람들은 이타적인 행위를 할 까? 이타적 행위는 모든 도덕철학에서 다루어온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항상 이기적이지만은 않으며, 때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 이상의 고상한 동기와 좋은 의도에서 이루어지는 행동도 많다. 셋째, 공리주의에는 아무런 마지노선이 없는가? 벤담식 공리주의는 원칙적으로 개인 혹은 소수는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수파’는 과연 어느 정도가 소수파일까? 1%? 49.99%? 개인은 대체 어디까지 희생될 수 있는가? 희생 가능한 정도와 불가능한 정도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가장 기본적인 자유의 권리와 생명까지도 희생될 수 있는가? 많은 공리주의자들이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수정, 보완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이전까지의 공리주의를 ‘행위 공리주의’라고 불렀다. 그전까지 공리주의는 공리 원칙을 개별적 행위에 적용해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체의 공리 증대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방식은 벤담식 공리주의가 만들어낼 수도 있는 폐단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공리주의는 다수가 소수를 억압히가 위한 핑계로 활용될 쑤 있기 때문이다. 벤담은 모든 사람의 가치가 평등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전제는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들어맞지 않을 때도 있다. 다시 트롤리 딜레마로 돌아와보자. 한 사람이 서 있는 궤도 위의 그 한 사람이 만약 당신의 자녀이거나 어머니라면, 그래도 당신은 전차가 그쪽 선로로 이동하도록 전철기를 누를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에게’ 지니는 가치는 결코 동등하지 한다. 이렇듯 공리주의 원칙은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 ‘달콤한 독약’으로도 묘사된다. 당신의 눈에는 공리주의가 어떻게 보이는가?